나는 제출한 졸업 논문의 사본을 손에 들고, 친구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취업 활동용 자료를 들고 서로 얼굴을 맞대었다. 오카베 세미나실에는 나와 이 녀석,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는 얼굴의 오카베 교수님이 있었다.
"야, 어떡하지. 우리 돌아가는 게 낫나"
방 구석, 자료로 입가를 가리고 몰래 대화를 하고 있자니 오카베 교수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찔하고 나와 친구는 어깨를 움츠렸다.
"저, 교수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무 것도 아니다. 배가 고프니 편의점에 다녀오마. 연구실을 부탁한다"
"다, 다녀오세요……"
교수님은 백의를 휘날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나와 그는 휴우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교수님의 신경은 굉장히 곤두서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야, 오늘 무슨 일 있었나?"
"으-응……. 따로 연구 발표회가 있다든가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오전 강의는 평범했어. 조금 텐션이 낮아서 꽃미남으로 보였지만"
"그 인과관계는 뭐냐"
"교수님은 가만 있으면 멋있단 거지"
"난?"
"입 다물고 있어도 시끄러워"
"제길"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한듯한 친구의 농담은 전혀 재미 없어서 그 이마를 찰싹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야! 하고 소리를 지르는 그를 무시하고 세미나실의 달력을 보았다. 12월에도 변함 없을 일정이 가득하다. 왜냐면 교수님의 일정에 추가하여 세미나생도 틈틈히 자신의 일정을 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14일. 14일……"
내가 너저분하게 쓰여있는 달력을 더듬었을 때였다. 똑똑하는 조심스런 노트 소리가 울렸다.
"네~에, 들어오세요"
"오카베, 있어?"
문 옆에 있던 친구가 그 목소리를 듣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 귀에도 익은 목소리였다. 친구가 문과 가까워서,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문을 연다. 칫, 늦었다! 어쩔 수 없으니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여는 친구 앞에 끼어들어서 나는 환영해야 할 방문자에게 웃는 얼굴을 보였다.
"크리스 씨 오랜만이예요!"
"앗 네놈, 야! 오랜만입니다! 다행이네요 저희가 있을 때 오셔서"
문을 열고 거기에 있던 것은 이 세미나의 교수 오카베 린타로의 아내이며 젊어서부터 천재 과학자로 높이 평가된 오카베 크리스 씨였다. 이 세미나실에도 이전 몇 번인가 방문한 적이 있어서 나나 이 녀석과도 안면이 있다.
"오랜만! 다행이다, 당신들이 있어서……. 아, 그런데 오카베는?"
나와 그는 평소와 달리 초조해하는 크리스 씨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지금 배가 고프다면서 편의점에 간다며 나가셨어요"
"엇갈려 버린 것 같네요. 그렇지만 골목에서 2분거리의 편의점이니까 곧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괜찮으면 여기서 기다리지 않으실래요?"
"그래도 괜찮니? 공항에서부터 엄청 서둘러서 온 거라 좀 지쳐서"
그런 크리스 씨는 유난히 큰 여행 가방을 끌면서 한 손에는 어딘지 고급스런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아, 혹시 여행에서 돌아오신 건가요?"
"여행이랄지, 출장이야. 실은 오늘 아침에는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저쪽의 기후가 나빠져서 비행기가 늦어버렸어"
자연스럽게 친구의 팔꿈치를 쿡쿡 찌르자 서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맡아둘게요'라고 하면서 크리스 씨의 여행 가방을 받아 조심스레 세미나실에 옮겨 넣었다.
"그럼 출장갔다 돌아오신 거면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먼저 집에 돌아가는 게 낫지 않나……"
"아"
크리스 씨는 멍하니 '그러고보니 그렇구나'하고 중얼거렸다. 나와 그는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오카베 교수님 말고 크리스 씨도 좀 상태가 이상하다.
"아~ 그러니까, 교수님께 뭔가 용무라도 있으신가요?"
"……"
크리스 씨는 어색한 듯이 시선을 피했다. 왠지 모르게 뺨이 붉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촉이 좋은 것 같은 붉은 머플러에 얼굴을 파묻고 '그러니까'하며 말끝을 흐린다.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길어진 밤색 머리카락은 꽤나 서둘러 온 건지 크리스 씨 답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다.
"저, 크리스 씨"
여행 가방을 방 구석에 옮겨둔 친구가 돌아와서 입을 다물어버린 크리스 씨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교수님 기분이 엄청 안 좋으셨는데 이유 아시나요?"
"오카베가?"
"네. 이렇게,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는"
친구는 집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을 꾸욱 눌러 보여주었다.
"그래서 오늘 무슨 일 있었나 싶어서"
"……혹시, 당신들 모르는 거야?"
"? 뭘요?"
나와 친구는 고개를 갸웃한다. 12월 14일. 나나 이 녀석 같은 독신에게는 괴로운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열흘 정도가 부족하다.
"오늘은, 오카베의"
크리스 씨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쿵쿵 하며 복도를 달려 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혹시, 하고 생각했을 때,
"……어째서 크리스가 여기 있지!"
"아, 교수님, 어서 오세요"
편의점 봉투를 한 손에 들고 교수님이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백의 차림으로 밖에 나갔는데 춥지 않았나.
"출장이 끝나서 돌아왔어"
"아니 너 그렇다면 왜 일부러 대학까지 온 거냐. 피곤할테니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나"
"왜, 왜 당신까지 그렇게 말하는데?!"
아니 뭐,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태클은 속으로만 하자. 이렇게 여행 가방을 끌고 대학에 오다니 수고가 필요하고 눈에 띄고 게다가 교수님도 최종적으로는 자택으로 돌아갈테니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귀가를 기다리는 게 효율도 좋다.
응, 그렇다는 건? 문득 떠오른 이유는 많은 부러움을 넘어 이미 기가 막히다는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크리스 씨……"
"……왜?"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세미나실로 직행하다니, 얼마나 교수님을 만나고 싶으셨던 건가요"
무심코 그렇게 말해 버렸다. 이것도 내가 여자라서 도출할 수 있었던 대답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둔감한 이과 남자 두 명은 내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크리스 씨는 얼굴을 붉히고 있다. 아무래도 내 추측은 정답이었던 것 같다.
"아, 아냐, 아니야! 오늘은 오카베의 생일! 생일이니까!"
"아니 그치만 생일이라도 귀국하자마자 바로 만나러 오다니 요즘 드라마에서도 안 그러잖아요. 그치?"
"아아, 안 하지. 이야 -교수님 사랑받고 있네요 전화나 메일로 때우지도 않고 돌아오자마자 축하해주기 위해 일부러 대학까지 찾아오는 아내분이 계서서 행복하시겠어요-"
크리스 씨를 존경하고 있을 친구가 무심코 조롱하는 어조가 될 정도로 달콤한 부부애였다. 니들이 신혼이냐 제엔장. 자식도 두 명이나 있는데 아직도 이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니 무슨 소리야.
분명 크리스 씨가 들고 있는 봉투는 교수님께 주는 생일 선물일 것이다. 바로 건네줄 수 있도록 일부러 여행 가방에 넣지 않고 따로 들고 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 건가, 크리스"
"아니, 그러니까 그, 생일이니까, 야"
"날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짐도 질질 끌고, 생일 선물을 들고 대학까지 왔나? 공항에서부터 분명히 돌아가는 건데"
"으……"
일본 뇌과학의 권위,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연구자 오카베 크리스의 얼굴은 어디 갔을까,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 '새, 생일이니까……'라며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소녀 같다. 나와 십여년의 나이 차이가 날 텐데도 이 사랑스러움은 무엇인지. 진 것 같다.
반대로 교수님은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 있는 크리스 씨를, 편의점의 봉투를 한 손에 쥐고 입 을 ㅅ자로 한 채로 응시하고 있었다. 저건 틀림없이 질투하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는 얼굴이다. 당장 입가와 움찔거리며 능글능글해질 것 처럼 보인다. 눈매라든지 정말 위험하다. 숨길 수 없다. 데롱데롱에 헤롱헤롱이다. 폭발은 커녕 폭산하라고 빌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
"……야"
"왜"
"우리 방해되는 거 아냐……?"
드물게 분위기를 읽은 듯한 친구가 나에게 귀엣말 한다. 더 눈치가 있는 놈이라면 여기서 일부러 물어보지 않고 내 팔을 잡아 세미나실에서 나가겠지만, 이 녀석에게 그걸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으니 그건 내 역할이 된다.
"그럼 교수님, 저랑 이 녀석은 지금부터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 그래"
"크리스 씨도 또 다음번에 얘기해요"
"에, 예에……"
나는 내 가방을 휙 잡고 친구의 가방도 하는 김에 주워서 소유자에게 내던졌다. 열린 분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오카베 부부의 등을 가볍게 눌러 세미나실로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재빠르게 손잡이에 있는 플레이트를 확 뒤집었다. '교수님은 부재중'이 표시되어 있다. 전에도 이런 적 있었지, 분명히.
뭐, 오늘은 교수님의 생신인것 같으니 엿듣는 건 그만 두자. 어차피 노닥거릴 게 분명하다. 세미나실은 러브호텔이 아니라고 다음에 메일 보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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